1. 킬링 디어, 고대 비극의 현대적 재해석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유리피데스의 고대 그리스 비극 '이피게니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아가멤논이 사냥 중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사슴을 죽인 후,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던 고대 신화를 21세기 미국의 중산층 가정으로 옮겨온 이 영화는, 폭력과 속죄의 순환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현대 사회의 맥락에서 재고찰 한다.
란티모스는 고대 비극의 형식적 요소들을 영화 언어로 교묘하게 변환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러스는 영화에서 냉정하고 기계적인 대사 전달 방식으로 대체된다. 등장인물들은 감정이 제거된 톤으로 대화하며, 이는 마치 고대 비극의 운문 대사가 지닌 의식적 성격을 연상시킨다. 특히 스티븐(콜린 파렐)과 마틴(배리 케오건) 사이의 대화는 정상적인 일상 대화가 아닌, 일종의 의례적 교환으로 기능한다.
'운명'이라는 고대 비극의 핵심 개념은 영화에서 마틴이 부여하는 초자연적 저주의 형태로 나타난다. 스티븐의 가족이 점진적으로 마비되고 죽어가는 상황은 그가 피할 수 없으며, 마치 신들에 의해 정해진 운명처럼 그를 옥죄어온다. 란티모스는 이를 통해 현대인이 통제력과 합리성을 가졌다는 환상을 깨뜨린다. 첨단 의료 기술과 과학적 지식을 갖춘 성공한 심장외과 의사 스티븐조차도 결국 초자연적이고 설명 불가능한 힘 앞에서 무력하다.
구조적으로도 영화는 고대 비극의 형식을 따른다. 영화의 전반부는 일종의 프롤로그로, 스티븐의 '하마르티아(치명적 결함)'—술에 취해 수술을 집도하여 마틴의 아버지를 죽게 한 것—가 점차 드러난다. 이어지는 중반부는 스티븐과 그의 가족이 점차 파국으로 향해가는 과정, 즉 고대 비극의 '페리페테이아(급전)'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후반부는 스티븐이 최종적으로 '아나그노리시스(깨달음)'에 도달하여 가족 중 한 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끔찍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다.
란티모스는 또한 신들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고대 비극의 중심 주제를 재해석한다. 영화에서 마틴은 단순한 복수자가 아니라, 거의 신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졌으며, 스티븐의 가족을 심판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의 냉정하고 감정이 결여된 모습은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고대 그리스 신들의 특성을 연상시킨다.
특히 영화의 제목이 직접적으로 참조하는 신성한 사슴의 살해는 단순한 신화적 알레고리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작용하는 속죄와 제물의 논리를 강조한다. 스티븐이 결국 자신의 아들 밥(써니 서직)을 제물로 바치는 결말은, 우리가 아무리 과학과 이성으로 무장하더라도 결국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제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암시한다.
란티모스는 이러한 고대 비극의 요소들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영화만의 독특한 미학적 특성을 구축한다. 차갑고 기하학적인 구도의 촬영, 불안감을 조성하는 음악, 그리고 배우들의 의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연기는 모두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영화에 독특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를 부여한다.
결국 '킬링 디어'는 단순히 고대 비극을 현대화한 작품을 넘어, 인간의 근원적 조건—폭력, 책임, 선택, 속죄—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진다. 란티모스는 현대 사회의 기술적, 물질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고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운명의 힘과 도덕적 선택의 무게 앞에 서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는 인간 조건의 본질적 측면을 탐구하는 진정한 현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2. 정의와 복수의 모호한 경계
'킬링 디어'는 정의와 복수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날카롭게 탐구한다. 란티모스 감독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며, 관객들에게 누가 진정한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 전반에 걸쳐 정의, 책임, 그리고 응보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여러 층위에서 드러나면서, 단순한 도덕적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의 깊이를 보여준다.
영화의 중심에는 스티븐의 과거 잘못—술에 취한 채 수술을 집도하여 마틴의 아버지를 사망하게 한 것—과 마틴의 복수—스티븐의 가족에게 초자연적 저주를 내려 그들이 마비되고 죽어가게 만드는 것—사이의 대칭적 관계가 자리한다. 표면적으로 마틴의 행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의 탈리오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스티븐에게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스스로 죽이라고 요구함으로써, 스티븐이 그의 아버지에게 가한 죽음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한다.
그러나 란티모스는 이 단순한 대칭성을 복잡하게 만든다. 스티븐의 원래 행위는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로 인한 사망이었지만, 마틴이 요구하는 것은 의도적인 살인이다. 또한 스티븐은 환자를 구하려다 실패한 의사였지만, 마틴은 고의적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가해자가 된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복수가 결코 정확한 균형을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새로운 불의를 낳는다는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영화는 또한 책임의 문제를 복잡하게 다룬다. 표면적으로 스티븐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한다. 그는 마틴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법적, 도덕적 책임도 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마틴과의 관계에서도 진실을 직면하지 않는다. 이러한 책임 회피가 결국 그의 가족에게 더 큰 재앙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진정한 정의가 공식적인 처벌 이상의 것, 즉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인정과 속죄를 포함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동시에 란티모스는 마틴의 복수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마틴이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점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복수 방식은 극단적이고 잔혹하다. 무고한 어린이들(스티븐의 자녀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그의 행동은 단순한 정의의 집행을 넘어선다. 특히 마틴이 스티븐에게 가족 중 누군가를 직접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가 단순히 균형을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티븐에게 심리적 고통을 가하고 그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시사한다.
영화의 가장 불편한 측면 중 하나는 마틴이 가진 초자연적 능력의 출처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모호함은 그의 복수가 인간적 판단을 넘어선, 거의 신적인 정의의 실행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십대의 병리적 행동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란티모스는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음으로써, 정의와 복수, 그리고 광기 사이의 경계에 대한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영화의 후반부에 전개되는 스티븐의 선택—세 가족 구성원을 의자에 묶고 눈을 가린 후 무작위로 총을 쏘아 결국 아들 밥을 죽이는 것—은 정의와 복수의 순환이 가져오는 궁극적 파괴를 보여준다. 이 잔혹한 장면에서 스티븐은 복수자(마틴)의 요구에 굴복하여 자신도 가해자가 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결국 그의 가족은 마틴의 저주에서 벗어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종류의 파괴와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마틴과 스티븐의 가족이 같은 식당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정의와 복수의 순환이 결코 완전히 종결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마틴의 미묘한 표정은 그가 여전히 완전한 정의를 얻지 못했다고 느끼는지, 아니면 자신의 복수가 성공했다고 만족하는지 모호하게 남겨둔다. 그리고 스티븐 가족의 침묵은 그들이 경험한 트라우마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킬링 디어'는 결국 정의와 복수라는 개념 자체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란티모스는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나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대신 이러한 개념들이 얼마나 쉽게 뒤틀리고 변질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희생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우리 사회의 정의 시스템과 복수의 논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3. 현대 가족 구조의 해부와 위선의 폭로
'킬링 디어'는 표면적으로는 복수 스릴러이지만, 그 심층에는 중산층 미국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권력 구조와 위선을 해부하는 예리한 사회적 비판이 자리한다. 란티모스 감독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머피 가족의 일상을 차갑고 임상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그 아래에 숨겨진 불안과 비진정성, 그리고 근원적 공허함을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터 스티븐과 그의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 사이의 성적 관계는 진정한 친밀감이 결여된 의례적 행위로 그려진다. 안나가 마취된 환자인 척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성적 판타지는 그들의 관계가 진정한 열정보다는 권력의 불균형과 통제에 기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부부 관계의 연출은 가족 내 권력 구조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취약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티븐과 자녀들(킴과 밥) 사이의 관계 역시 진정한 정서적 연결보다는 권위와 지배의 논리에 기반한다. 그는 자녀들에게 학업 성취를 강조하며 그들의 신체적 발달(특히 딸 킴의 월경)을 감시한다. 이러한 모습은 아버지의 보호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지는 통제와 감시의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특히 생일 선물로 아들에게 정확히 같은 시계를 다시 사준 장면은, 진정한 개인적 관심보다는 형식적 의무로서의 부모 역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란티모스는 또한 머피 가족의 물질적 풍요와 그들이 거주하는 넓고 깔끔한 집을 강조함으로써, 중산층 가정의 표면적 안정과 내적 공허함 사이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완벽하게 정돈된 거실, 깔끔한 침실, 그리고 넓은 정원은 모두 사회적 체면과 성공의 표식으로 기능하지만, 그 공간 내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진정한 소통이나 연결 없이 서로 고립되어 있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마틴의 저주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이 점차 마비되고 통제력을 잃게 되면서, 이 가족의 취약성과 내적 균열이 물리적으로 가시화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각 가족 구성원이 보이는 반응이다. 스티븐은 계속해서 문제를 부정하고 의학적 용어로 상황을 합리화하려 하며, 안나는 성적 호의를 통해 스티븐의 동료 의사에게 정보를 얻으려 한다. 자녀들은 각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부모에게 호소한다.
특히 킴과 밥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벌이는 심리적 경쟁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킴이 어머니에게 "아빠는 날 더 사랑해. 모든 아버지가 딸을 더 사랑하지."라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밥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내 머리카락을 더 많이 자를게요"라고 약속하는 장면은, 가족 내에서 사랑이 어떻게 조건적이고 거래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는지를 가차 없이 드러낸다.
란티모스는 또한 머피 가족과 그들이 속한 더 넓은 사회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스티븐의 직업(심장외과 의사)과 그가 병원에서 가진 권위는 그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상징한다. 그러나 마틴이라는 외부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사회적 지위와 특권은 그와 그의 가족을 보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직업적 과실(술에 취해 수술을 집도한 것)은 그의 가족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이는 성공과 사회적 인정이 결코 도덕적 책임으로부터의 면제나 진정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가족 구조의 회복과 동시에 그 근본적 변화를 보여준다. 아들 밥의 죽음 이후, 머피 가족은 표면적으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마지막 식당 장면에서 그들이 보이는 침묵과 딸 킴이 마틴을 향해 던지는 복잡한 시선은, 이 가족이 경험한 트라우마의 지속성과 그들의 관계에 생긴 영구적 균열을 암시한다.
'킬링 디어'는 결국 현대 가족 구조의 취약성과 그것이 기반한 위선을 폭로한다. 란티모스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단위가 얼마나 쉽게 붕괴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과 책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쉽게 뒤틀리고 변질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들에게 우리가 당연시하는 가족 관계와 사회적 규범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도록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