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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 사랑의 형태와 사회의 규범

by happywoneylife 2025.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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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_포스터

1. 더 랍스터,  강제된 결합과 억압된 개인성의 디스토피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는 사랑과 관계가 제도화되고 강제되는 기괴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영화의 세계에서 모든 성인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하며, 45일 이내에 파트너를 찾지 못하면 자신이 선택한 동물로 변해버리는 극단적인 규칙이 존재한다. 이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를 넘어, 현대 사회에서 결혼과 연애가 지니는 규범적, 제도적 성격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로 기능한다.

영화는 아내와 이혼한 후 호텔에 입소하게 된 데이비드(콜린 파렐)의 여정을 따라간다. 호텔의 삭막하고 기계적인 분위기는 이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감정과 개성을 억압하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모든 거주자는 획일화된 옷을 입고, 정해진 일과를 따르며, 무엇보다 '공통점'을 기준으로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성은 코피를 흘리는 남성과 매칭되고, 심장병이 있는 여성은 같은 질환을 가진 남성과 짝지어진다. 이러한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매칭 시스템은 현대 사회의 데이팅 앱이나 맞선 문화에 대한 극단적 패러디로, 진정한 연결이나 공감보다는 표면적 유사성에 기반한 관계 형성의 공허함을 드러낸다.

호텔 관리자들이 진행하는 '시범 공연'들—행복한 커플의 일상, 혼자 있을 때의 위험성 등을 보여주는—은 사회적 규범이 어떻게 프로파간다와 공포를 통해 강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호텔 관리자와 그의 파트너가 '사랑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연기하는 부부 싸움 장면은, 제도화된 관계의 연극적 본질과 그 아래 숨겨진 공허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면서도, 우리 자신의 사회가 얼마나 결혼과 연애를 이상화하고 강제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영화에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인 요소 중 하나는 '변형'의 위협이다. 파트너를 찾지 못하면 동물이 된다는 극단적 결과는, 현대 사회에서 싱글에 대한 낙인과 배제를 과장되게 형상화한 것이다. 데이비드의 형제였던 개가 항상 그의 곁에 있는 설정은, 이 위협이 단순한 상상이 아닌 실제 현실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세계의 사람들이 이러한 잔혹한 시스템을 내면화하여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데이비드를 포함한 호텔 거주자들은 변형의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그 시스템의 정당성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호텔에서의 일상은 다양한 잔인한 의식과 훈련으로 가득 차 있다. 거주자들은 정기적으로 숲으로 나가 '독신자'(레이아)를 사냥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 장면들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 어떻게 시스템에 의해 정당화되고 보상받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에 대한 폭력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숏건으로 무장한 호텔 거주자들이 마취총으로 도망치는 독신자들을 사냥하는 장면은,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체계적 폭력의 극단적 은유로 작용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데이비드는 이 시스템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는 심지어 감정이 없는 여성(안젤리키 파푸리아)과 짝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성격을 거짓으로 꾸미기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점차 진정한 연결의 부재와 강제된 관계의 공허함을 깨닫게 된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러한 '공식적인' 결합이 얼마나 인위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특히 데이비드가 파트너의 잔인함을 깨닫는 장면—그녀가 그의 개(원래 형제였던)를 죽이는 장면—은, 표면적 매칭이 얼마나 진정한 이해와 공감과는 거리가 멀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영화의 미장센은 이러한 주제적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강화한다. 차갑고 중성적인 색감, 기하학적으로 정돈된 공간, 그리고 인물들의 경직된 신체 언어와 감정이 결여된 대화 방식은 모두 이 세계의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시각화한다. 특히 란티모스 특유의 평면적이고 원거리의 촬영 스타일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세계와 그 안의 인물들을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만든다. 이는 영화가 그리는 사회 자체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개성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방식을 형식적으로 반영한다.

'더 랍스터'의 전반부는 결국 강제된 결합의 디스토피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개성을 억압하는지, 그리고 그 시스템이 어떻게 폭력과 거짓을 통해 유지되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러한 극단적 상황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사회에서 '정상적' 관계와 결혼이 어떻게 제도화되고 때로는 강제되는지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2. 반체제의 역설: 또 다른 형태의 억압

'더 랍스터'의 후반부는 데이비드가 호텔을 탈출하여 숲 속의 독신자(레이아) 집단에 합류하면서 시작된다. 이 전환은 표면적으로는 해방과 저항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영화는 이내 이 반체제 집단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억압적 시스템임을 드러낸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를 통해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강제된 결합 대 자유로운 독신—을 넘어, 모든 형태의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진정한 연결을 억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신자 집단은 호텔의 규칙과 정반대 되는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로맨틱한 관계나 성적 접촉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레드 키스'라는 잔인한 처벌—입술을 칼로 베는 벌—을 받게 된다. 이 집단의 지도자(레아 세이두)는 호텔 관리자만큼이나 독재적이고 교조적인 인물로, 모든 구성원의 행동을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한다. 이러한 설정은 반체제 운동이나 대안적 생활방식이 종종 그들이 반대하는 시스템만큼이나 억압적이고 교조적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숲 속 생활의 묘사는 이 역설을 더욱 강화한다. 독신자들은 호텔과는 달리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엄격한 규율과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각자 혼자 잠을 자고, 혼자 춤을 추며, 심지어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의식까지 수행한다. 이러한 고립된 행위들은 단순한 독립성의 표현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강제된 개인주의를 나타낸다. 독신자들은 호텔 거주자들처럼 형식화된 삶을 살고 있으며, 단지 그 내용만 정반대일 뿐이다.

이 반체제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시 감정의 억압이다. 호텔이 인위적 결합을 강요했다면, 독신자 집단은 모든 형태의 정서적, 육체적 친밀감을 금지한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성(레이첼 와이즈) 사이에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감정은 이 공동체의 규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고 암호화된 제스처와 언어로만 소통해야 한다. 이들이 발명한 비밀 언어—손으로 특정 제스처를 취하거나 특정 춤을 추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는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가 억압될 때 어떻게 변형되어 표출되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비유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두 시스템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이다. 양쪽 모두 엄격한 이진법적 세계관—짝/독신, 관계/고립—에 기반하며, 제3의 가능성이나 개인적 선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호텔에서는 모든 행동이 파트너 찾기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숲에서는 모든 행동이 독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극단적 이분법은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다양성, 그리고 개인적 선택의 가치를 무시한다.

영화는 이러한 대립적 시스템 사이에서 데이비드와 근시 여성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연결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관계는 호텔의 인위적 매칭이나 독신자 집단의 완전한 고립과는 다른, 자발적이고 진실된 감정에 기반한다. 그들이 공유하는 근시라는 특성은 호텔의 논리에서는 '완벽한 매치'로 여겨질 수 있지만, 영화는 이러한 표면적 유사성보다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해와 공감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이 관계마저도 사회적 규범과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성이 함께 도시 외출을 나갔을 때, 그들은 부부로 가장해야만 한다. 이 장면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관계 형태를 수행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백화점에서 경찰이 신혼부부로 가장한 그들을 검문하는 장면은, 국가가 어떻게 개인의 관계와 친밀성까지 감시하고 통제하는지를 드러낸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근시 여성이 지도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모습, 그리고 데이비드의 진실된 감정을 의심하는 모습은, 교조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인간 관계를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근시 여성이 결국 데이비드를 테스트하기 위해 맹인 행세를 하는 장면은, 그녀 역시 어느 정도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어떤 형태의 극단적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진정한 신뢰와 친밀감을 방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더 랍스터'의 중반부는 반체제 운동조차도 어떻게 또 다른 형태의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연결이란 어떠한 극단적 이데올로기로부터도 벗어나는 데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란티모스 감독은 이를 통해 단순한 반란이나 체제 전복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3. 자기 변형의 비극: 사랑의 극단적 대가

'더 랍스터'의 마지막 부분은 영화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시적인 시퀀스로,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 변형의 비극적 결말을 그린다. 근시 여성이 실명하게 된 후, 데이비드는 자신이 진정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한다. 이는 그가 호텔의 매칭 원칙을 내면화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독신자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궁극적 반란이기도 하다. 데이비드가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포크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마지막 장면은,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의 극단적 형태이자, 사회적 강박에 대한 비극적 굴복의 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최종 행위는 여러 층위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연결을 위해 자신을 변형하고 희생하려는 절박한 시도다. 데이비드는 근시 여성이 실명한 후, 그녀와의 공통점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도 맹인이 되려고 한다. 이는 사랑을 위해 극단적인 자기부정까지도 감수하려는 인간 심리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행위는 '공통점'을 통한 연결이라는 호텔의 왜곡된 논리를 그가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데이비드는 표면적 유사성 없이는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통념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더 깊은 층위에서, 데이비드의 자기 실명은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 부분을 희생하는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강력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 욕망, 그리고 가치관을 억압하거나 변형한다. 데이비드의 극단적 선택은 이러한 일상적 자기부정의 과장된 형태다. 그것은 사회적 수용과 친밀한 관계를 위해 우리가 치르는 심리적, 정서적 대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

영화가 끝나는 장면—데이비드가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근시 여성이 레스토랑에서 홀로 기다리는 모습—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그가 실제로 자신의 눈을 찔렀는지, 그리고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관객으로 하여금 데이비드의 선택과 그 함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행동은 사랑을 위한 궁극적 희생인가,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대한 비극적 항복인가? 그는 진정한 자유와 연결을 찾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구속에 빠진 것인가?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적 처리는 이 마지막 시퀀스의 정서적 충격을 극대화한다.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눈을 찌르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그의 결정적 행동을 암시하는 사운드와 시각적 단서들을 통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는 란티모스 특유의 절제된 폭력성으로, 직접적인 묘사보다 더 강력한 심리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근시 여성을 연기하는 레이첼 와이즈의 표정—기다림, 불안, 그리고 어쩌면 희망이 뒤섞인—은 영화의 다층적 주제를 응축한다. 그녀는 데이비드의 선택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인지, 아니면 또 다른 사회적 강박의 결과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불확실성은 영화 전체에 걸쳐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최종적 응답을 유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사랑, 사회적 규범, 그리고 진정한 연결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더 랍스터'는 결국 사랑과 관계에 관한 단순한 결론이나 처방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우리가 당연시하는 사회적 규범과 기대들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친밀한 감정과 관계까지도 왜곡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불편하지만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란티모스 감독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극단적 자기 부정과 희생의 비극성을 보여주면서, 진정한 친밀감과 연결이란 어쩌면 모든 강제된 규범과 기대로부터의 해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데이비드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사회적 규범(공통점을 통한 연결)에 대한 궁극적 굴복인 동시에, 그 규범에 대한 극단적 전복이기도 하다. 그의 자기 변형은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모순은 '더 랍스터'가 제기하는 근본적 질문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회적 기대와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규범적 연결과 진정한 친밀감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기 변형과 희생을 감수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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